다공질 인간의 도래 이선영(미술비평)

다공질 인간의 도래

이선영(미술비평)
 강덕봉의 작품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지만, 조각의 오랜 기준이었던 인체는 그 실체적 본성을 잃고 다공질의 무엇인가로 변모한다. 헤쳐 모이면서 오밀조밀하게 접합된 통과 관들은 조각상의 지지를 위한 구조적 역할도 담당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인체 또는 조각의 물질적 실체를 휘발시키는 휭 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가 2007년부터 주로 사용해 왔던 PVC는 무엇인가를 통과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어떤 비밀도 머무를 곳이 없을 만큼 뻥 뚫려 있는 듯하다. 물음표나 가면 같은 도상이 등장하며, ‘hide’라는 전시 부제는 이러한 투명 존재들에 붙여진 역설적인 이름이다. 그것은 너무나 투명해지고 드러나 있기에 오히려 불투명해지고 감추어진 인간의 새로운 단계를 표현한다. 무릇 너무나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에는 삶의 비밀이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강덕봉이 사용하는 PVC는 볼펜이나 형광펜 사이즈의 크기부터 동전만한 것에 이르기 까지 대략 3-10가지 정도의 굵기를 가진다. 필요한 사이즈는 따로 주문하기도 하지만, 대개 대량 생산된 재료들을 사용한다. 전통적 조각을 이루어왔던 나무나 돌, 금속 덩어리와 달리, 그의 작품에서 인간을 이루는 구성성분들은 더 많은 정제와 가공을 거친 것이며, 예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위적 속성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앞에서 볼 때와 옆에서 볼 때의 시각적 단절감으로 인해, 조각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입체감과 차이가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조각의 시간적인 요소는 여전히 작동하여, 사선으로 잘려진 타원이 각도에 따라 원으로 보이거나 인체에 각인된 표정이 변한다든가 하는 면이 있기는 하다. 인간에 내재된 수수께끼 같은 본성은 시각적 트릭에 많이 의존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7년 모란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보다 더 많은 굵기의 관들이 활용되어 섬세함을 더하였으며, 자동차 도료로 칠해진 화려한 외관은 원재료를 계속 감추고 있다. 강도 보강을 위해 내부에 금속 지지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플라스틱 관으로 만들어진 인체 상들은 묵직한 중량감을 가진 듯한 효과를 줄 뿐이다. 다양한 굵기의 통과 관들의 배열은, 파이프를 소통에 대한 메타포로 활용해 왔던 초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더욱 복잡해진 구조와 색상은 인간 간에 기대되는 바의 투명한 소통을 여전한 이상으로 남겨 놓는다. 공간공포증을 연상시키는 가득 메워진 관들은 채워질수록 비워지는 역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입체 작품 6점 외에, 벽에 걸린 부조 7점은 가면이라는 소재를 통해 소통에 드리워진 불투명한 차원들을 부연한다.
 각시탈이나 하회탈 등 이미 알려진 기존의 도상 외에, 우는 듯 웃는 듯한 복합적인 인상의 창작가면 등이 걸려 있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소통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깔고 있는데, 인간은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투명한 소통은 복마전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가면을 벗기면 본질이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 인간상 자체가 고정된 본질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면 뒤에는 또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상적 인간상에 내재된 본질과 실체에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가상의 유희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윤리학과 미학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지시한다. 다양한 크기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인체상은 어디론가를 향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며, 세밀한 묘사 보다는 흐릿하게 잔상만 남은 속도감이 특징적이다. 발 부위는 매우 크고 머리로 갈수록 스케일은 줄어들어 퍼즐 조각 하나로 머리통을 대신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축소되어 있으며, 그 역시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듯한 부분성이 두드러진다. 근대에 과신되어온 이성은 그 총체적 이상과는 달리 파편적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가 침소봉대 된 것으로, 강덕봉의 작품에서 급격하게 상대화된다.
몇 개의 판으로 구성된 두 명의 실루엣이 악수를 하는 작품은 보색 대비를 가지고 있으며, 그나마 양끝으로 갈수록 흐리게 처리되어 있어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양 팔을 허리에 얹은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가슴팍에 새겨진 거대한 물음표는 한 길 사람 속을 모르는 사정을 표현한다. 두 팔을 벌린 남자의 가슴 부분에 만들어진 얼굴은 앞뒤에 따라 표정이 정반대로 변한다. 그것은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웃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는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표현한다. 물음표 실루엣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여성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낸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인간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이며, 인간의 실루엣을 가진 파이프 덩어리들은 인간을 또 다른 차원에서 조명해 준다. 파이프로 만들어진 인간은 기관과 기관, 세포와 세포 사이를 잇는 수많은 연결 관으로 이루어졌을 몸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에서는 실체 자체가 관계망이며, 구조가 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목적을 가정하는 실체론적 사고는 사라진다. 파이프들은 인체에 대한 고정된 한계를 넘어서 계속 덧붙여질 수 있다. 그것은 물질이 스스로 구성 내지 구축해 나가는 형태이며, 명확한 측정과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의 인체상은 기계적 구조를 가짐으로서 인간이 도달하게 된 새로운 단계를 상징한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역사적으로 부침해온 인간의 본성 변화를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켄타우로스, 즉 자연과 섞여 있는 인간의 운명에서 시작하여, 생산 속에서 변형되며 자신의 존재를 인위적으로 발전시키는 인간에 도달한다. 본성이 계속해서 변화하여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에 이르게 된다. ‘켄타우로스 되기’, ‘인간-인간되기’를 잇는 것이 ‘기계-인간되기’이다. 근대 이후에 펼쳐진 기계적(machinic) 단계는 인간의 본성에 부착되는 인공물들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생산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생산이다. 네그리에 의하면 고대에 사람이 켄타우로스였던 곳에서 노예는 짐을 나르는 짐승이었다. 근대에 ‘인간-인간’의 공동체는 생산에 바쳐진 공동체이다. ‘인간-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공통적 착취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과 오성, 한계의 극복을 통해 근대적 단계를 벗어났다. 이와 함께 초월과 명령이라는 형이상학적 과오도 종말에 도달했다. 탈 근대적 단계에서 인간은 보철들(prosthesis)로 변신(metamorphosis)한다. 여기에서 생산이란 것은 소통이며, 특이성의 생성(generation)이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소통의 매개가 되는 여러 단계의 파이프들은 인간이 활용하는 외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언어는 소통 도구의 정점에 있는 것으로, 주체성은 우리가 언어라고 정의하는 외부 앞에 놓여 진 내부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구, 언어, 주체는 하나의 공통적 존재양태를 가진다.
 네그리는 탈근대적 맥락에서는 몸의 힘이란 지식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성은 공통적이 됨으로서 도구를 통합함으로서 점점 더 육신적으로 된다. 마찬가지로 몸은 점점 더 지성적으로 된다. 일반지성의 발생과 함께 우리는 ‘인간-기계’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도구 혹은 언어)가 몸들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한에서 기계를 욕망하게 된다. 몸이 언어를 통하여 생산기계를 재전유하는 ‘인간-기계’의 시대에서는 기계적 욕망이 새로운 삶, 새로운 몸,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것은 노동자인 동시에 기계임의 표현이고 고통 속에 사는 동시에 즐거움 속에서 살아감의 표현이며, ‘인간-기계’, 즉 기계적 몸의 생산인 동시에 재생산임의 표현이다. 강덕봉의 작품에서 기계적인 측면은 반복과 폐쇄가 아니라, 그 분자적 형태의 조합과 배치를 통해 바깥으로 열려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신하는 과정적 존재이다. 네그리와 기계 개념을 공유하는 펠릭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기계적 배치는 자신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통하여 존재론적 문턱, 비선형적인 불가역성의 문턱, 개체 발생적이고 계통발생적인 문턱, 이질 발생적이고 자기 생산적인 창조적 문턱을 넘어감으로서 자신의 일관성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도 (기계적) 배치는 우연이나 보편적인 공리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즉 배치가 종속되는 유일한 법칙은 일반적인 탈(脫)영토화 운동이라고 덧붙인다.
 다양한 크기로 이루어진 파이프들은 형식주의나 물화를 낳는 단일한 언어학적 기표의 통제아래 놓이지 않는다. 이 복잡한 통과 관들은 지금도 새로운 관계들 속에서 계속 생성되는 듯하다. 강덕봉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상의 구조는 하나로 틀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 작동하는 기계적 양상을 띤다. 그의 작품이 의미하는 것은 기계적 주체성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기계적 주체성, 기계적 주체화의 배치는 상이한 부분적 언표 행위들을 혼합하고, 말하자면 주체 대상관계 이전에 그리고 그 관계 옆에 설치된다고 말한다. 기계적 주체성은 집합적 성격을 지니며 다중 구성 요소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체성 생산이 지닌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아름다운 것은 주체성의 특이한 생성’(네그리)이다. 그것은 억압을 낳는 주체성에 대한 어떤 보편주의적 표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강덕봉의 작품에 나타나는 파이프의 분자적 이합집산은 어떤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을 생성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자적 움직임은 인간 고유의 무의식과는 다른 기계적 무의식을 낳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선험적 이상주의와 달리, 환원 불가능하고 측정 불가능한 특이성을 가진다. 구성 및 구축적 논리는 그것이 주는 피상적인 인상과 달리, 불확정성과 자율성을 증가시킨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의 자유가 놓여 질 새로운 바탕이다.

The Advent of Multi-Perforated Man

Lee Sun-young (Art Critic)
 It would be wrong to call Kang Duck-bong’s work lightweight, at least in terms of its ideas and style. However, in his work, the body, as a time-honored subject of sculpture, undergoes changes that transform it into a multi-perforated surface, devoid of its essential substance. The tubes — which when put together seem to spread out and gather again — play a supporting role in the sculptural statues. Despite their supporting role, these media also exude a slightly empty feeling, which seems to make volatile the material substance of the body in sculpture. PVC has, since 2007, been one of his favorite materials to work with. PVC tubing might be thought of as a medium through which we pass things, though it also gives his work a wide-open feeling, without any small spaces where secrets can lurk. Along with the appearance of graphic images such as a question mark or a mask, his use of the subtitle ‘hide’ explains the paradox that occurs when the subjects in his sculpture are left open and exposed. Their sheer openness and overwhelming transparency reflect a new phase of humanity, in which we are in actuality not transparent, but hidden.
 The PVC that Kang has been using as his main material, comes in a wide range of sizes, from the width of a ballpoint pen or a highlighter to that of a coin, with thicknesses of 3 to 10 level. Occasionally he will have a particular size made to order, though he usually uses mass-produced and commonly available stock for his materials. Unlike traditional materials such as wood, stone, and base metals, the components in his work have undergone industrial processes in their making, reinforcing the inherent characteristics of artificiality. When seen from the front, his work has quite a different appearance from what is found when viewing side-on, and this distances his work from a natural sense of three-dimensionality that is often pursued by other sculptures. However, a temporal element of sculpture still operates, making a diagonally-cut oval look like a circle, or causing facial expressions to appear to change, depending on your standpoint. He relies a lot on visual trickery in his bid to express the riddle-like tendancies that are a natural part of the human condition. When compared to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Gallery Moran in 2007, this exhibition shows a much higher degree of sophistication, in the way he is able to create these effects by utilizing diverse thicknesses of tubes. It is also notable that the lighthearted appearances created through the use of auto paint, tends to effectively hide the original materials. Despite the use of metallic armatures, which have been used to reinforce and stabilise the sculptures, it is the plastic tubes that have given the body statues the illusion of heaviness and mass. His arrangement of a wide range of different thicknesses of pipe, has extended the line of inquiry of his previous work, which took the tube as a metaphor for communication, but the complicated structure and color seems to signify that a real sense of transparency in communication still remains nothing but an ideal for people. The densely fastened pipes seem suggestive of cenophobia (a fear of open spaces), revealing a paradox in that the denser they are, the more empty it becomes. Besides six three-dimensional works, there are seven reliefs hung on the wall, which, through the subject of the mask, help describe the levels of opacity found in communication.
Besides the well-known types of mask imagery, such as Gaksital and Haheotal, masks are hung with indescribably complex expressions, making it difficult to tell whether they are smiling or crying. The underlying desire for communication between one another is foiled, and they are therefore a long way from achieving a sense of transparency. Due to people’s disconnection from truth things turn to bedlam. However Kang’s work doesn’t hold on to the fantasy that there is an essence behind the mask. Humans are inherently lacking in fixed essences. When the mask is removed all we find is another mask behind it, and each layer beneath this is just the same. If there is a difficulty in locating the essence and true nature of human beings, the game of reflection is not necessarily bad. This determines a juncture where a separation occurs between ethics and aesthetics. Composed of a variety of sizes of pipes, these body forms are in the act of moving somewhere, and rather than being meticulous depictions are characteristic of the vague afterimages produced by the speed of movement. The feet are very large, and in looking up and across the body of the sculpture, the scale becomes smaller, with a piece of puzzle expressing its head. The significance of reason within humans is reduced, and it is noticeable that it seems to be separated from the whole body. There has been an assumption that reason was an integral and ideal element in our understanding of what it means to be human. This would seem to be giving it too much importance, as in truth it is fragmentary. Kang’s work shows that the significance of this part of the human condition was exaggerated, leading us to recognize that modern man’s certainty about reason was a relevant truth.
 The work that depicts two people shaking hands is composed of several puzzle pieces, characterized by contrasting colors, with gradual shifts towards vagueness at each end representing the superficial relationships found among people. Despite the confidence shown in their two-armed embrace, the large question mark engraved on the chest represents the old Korean old proverb that even though you might know the ten currents of a river path, you might never know one cover of the human mind. On the chest of a man with his arms thrown open wide, a face has been created, showing opposite expressions depending on whether it is seen from the front or from behind. It describes a contradictory state of mind, in which people are sometimes crying on the inside despite the smile across their faces. The figure with the external form of a question mark describes a curiosity towards women who rarely reveal themselves. In Kang’s work, the human being still remains – whether negatively or positively – as an unknown being, the mass of pipes creating the silhouette of a body, to illuminate humans from another perspective. These pipe-people are related metaphorically to human bodies, which are composed of innumerable networks of tubes between organs and cells. a substantial entity becomes a networked structure. Here there is no place for Substantialism, which presumes a certain type of metaphysical essence or objective. In describing the human body, it is possible for pipes to be added beyond a fixed line. In other words, it can be said that an object shapes itself, making itself impossible to measure or clearly predict. His statues of human figures suggest a new stage, where the human body has reached with the help of its mechanic structure.
 In ‘Time for Revolution’ Antonio Negri discusses the struggle for change in the inherent characteristics of a human. According to Negri, starting with the destiny of the centaur (man fused with nature), man then reaches the destiny of the ‘homo-homo’ (man made through praxis), until he arrives at the destiny of the ‘man-machine’ (man transformed through production, artificially developing his being): these are his second, third, and nth natures. ‘The destiny of the centaur’ is connected with ‘homo-homo’ through to the ‘man-machine’. The ‘man-machine’ stage that has developed since modern times is a production made in a world where artificial objects have been attached to the inherent characteristics of a materially produced human being. According to Negri, in the ancient times when the human was a centaur, a slave was none other than a livestock fostered to make it convey baggage. The modern ‘homo – homo’ society dedicated itself to production, with a prevalent tendancy for one person to exploit another. Humans finally escaped from modernity by coping with issues of labor and its subsequent limitations. Along with this, metaphysical trangressions such as power and transcendence have reached an end. In the stage of post-modernism, humans metamorph into prosthesis. Here production signifies communication, or in other words, a singularity is generated. In Kang’s work, an array of pipes, playing a mediating role for communication, is implanted onto the human body itself, rather than used as a sort of external tool. Language is the primary tool for communication, and subjectivity is not something internal, placed in front of the external definitions of language. Within the same context, tools, languages, and subjects share a common way of being.
 Negri states that, within the context of post-modern life, the power of the body comes from power of knowledge. Reason is commonly being integrated with the tool, thereby becoming increasingly more and more corporeal. Likewise, the body is becoming more cerebral. Along with the development of general intelligence, we are able to enter an era of the ‘man-machine’. Machines (tools or language) desire machines within the bounds of the expanding productive capacities of the body. In the era of the ‘man-machine’, when bodies exclusively possess machines for the production of language, a mechanoid desire urges the creation of new life, a new body, and a new machine. It signifies the way that laborers have become machines, leading their lives with happiness as well as struggle, or in other words, it is a production by mechanical bodies as well as through reproduction. The man-machine aspect in Kang’s work is open to the outside through the assembly and arrangement of molecular forms, instead of their repetition and closing. In other words, it keeps transforming as a transitional existence. Sharing this concept of the machine with Negri, Felix Guattari states in ‘Chaosmosis’ that mechanic arrangement reaches a coherence by surpassing thresholds such as existentialism, nonlinear irreversibility, ontogeny and phylogeny, and self-productive creation. Guattari adds that as (mechanic) arrangement does not submit to coincidence or to the general common-good, the only principle that arrangement is subordinated to is the general movement of becoming. These pipes, in their variety of sizes, are not placed under the control of a single linguistic signifier, which leads to a formalism or objectification. The complicated cylinders and pipes seem, even now, to be generated continuously with new connections. Kang’s structure of a new human form doesn’t fit within a certain type of framework, as much as to take on a mechanic state of being, that is operated by the assembled parts. His work signifies mechanic subjectivity. Guattari states that the arrangement of mechanic subjectivity, or subjectification, combines different partial linguistic expressions Mechanic subjectivity has collective characteristics, and is composed of multiple elements. He underlines the artistic and creative characteristics which are inherent in 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 Negri suggests that beauty is an unusual invention of subjectivity. It breaks down a certain type of general subjective representations that bring up suppression. The molecular realignment of pipes in Kang’s work generates a movement that brings forth transformation. The molecular movement of desiring machines yields a mechanic unconsciousness that is different from the one that is inherent to human beings. It is characteristic of an irreducible and imeasurable singularity, unlike the transcendental idealism of the human. Unlike its superficial impression, compositional and constructive logic increases uncertainty and autonomy. It is a new platform where the freedom of human beings is currently f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