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봉 작가는 현대사회를 ‘속도’라는 개념으로부터 고찰(考察)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인간은 현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사회 각 영역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특별히 산업혁명 이후 정보화 사회를 넘어 초지능, 초연결 사회에 이르게 되면서 인간의 삶은 그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급격한 ‘속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는 사회가 현대화 산업화되면서 일어난 일인데 이미 20세기 초 미래파 같은 일군의 예술가들은 이 속도에 대한 감각을 그들의 작업에 표현함으로써 현대사회가 가져온 속도를 예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변화와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사회로의 이행과정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지난 세기의 역사가 증명한 바 있다.
강덕봉 작가는 역시 작업에서 속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는 오히려 속도 안에 갇혀버린 인간이 표현되어 있다. 그가 표현한 인간의 형상은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다. 속도에 매몰되어 형체마저 사라져버린 듯 속도의 방향을 향해 늘어난 인체의 모습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번 전시의 경우 이 연장된 인체의 모습은 반사되거나 투명, 반투명의 재질에 인쇄되어 인간의 형상은 단순히 속도감이 표현되어 있는 것 이상의 일종의 환영처럼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반투명 재질의 천이나 PET, 홀로그램 PVC 특수재질의 재료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화면을 만드는 재료의 특이성에 추가적으로 화면을 반원 통 모양으로 휘거나 늘어나게 만들고 여러 겹으로 겹치게 보이게 하되 레이어(layer) 모서리 부분이 마치 풀려나가는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이미지의 환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환영의 구조가 있게 된 구조마저 드러나 보이게 만들고 있다. 분명 작가는 일상적 삶에서 이미지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속도의 흐름 가운데 구체적 형상은 사라지고 흔적으로 남겨진 이미지까지도 어쩌면 환영적 구조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감각하거나 사유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움직임과 변화가 아니라 멈춤과 정지와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강덕봉 작가가 표현한 것들은 속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속도감을 정지된 상태로 보여주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속도를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혹은 대상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일종의 환영처럼 보여주는 가운데 그 환영의 구조마저 껍질을 벗겨내듯 보여줌으로써 제대로 느끼거나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속도 자체에 함몰되어 있는 현대인의 일상이 환영과 같은 허상일 수 있음을 각성하도록 만들고 있다.
인간 사회가 속도와 경쟁으로 물질문명의 발전만을 향해 돌진하게 될 때 인간의 정신은 피폐해질 수도 있고 인간마저 소외될 수 있다. 작가는 ‘속도로부터 잠시 벗어나서 사색적인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본연의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속도의 흔적을 멈춰진 상태로 감상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이번 전시는 인간의 실제 형상마저 늘어난 선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된 속도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위해 가속화한 속도에 오히려 인간이 매몰되어 버린다면 인간은 존재 자체도 환영처럼 사라져버릴는지 모른다. ‘멈춤’, ‘일시 정지’라는 것은 감각하고 사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그것을 작업으로 우리에게 확인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