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봉은 2007년 이래로 ‘PVC 파이프’를 작업에 활용하여 다공질 형상의 구멍 뚫린 사물이나 사람을 표현하게 된다. 작가가 처음 PVC 파이프로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사람의 신체 또는 여러 사물의 단면을 잘라 놓은 듯 표면에 무수한 구멍이 보였지만, 2010년부터는 작업에 ‘속도’라는 개념을 추가하면서 움직이는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을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 보이는 특징은 더욱 선명해진 대상의 ‘속도’와 더불어 움직이는 대상에서 느껴지는 복합적인 상호 관계성인데, 특히 빠른 속도 속에서 움직이는 대상은 다양한 움직임과 방향을 가지고 있고 외부 힘에도 영향을 받으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았을 때에는 작품에 등장하는 자동차, 오토바이, 사람 등은 주로 속도감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표피적 측면이 아닌 내용적 측면에서 작품을 해석해보자면 대상의 형상은 작가가 찾고자 하는 어떠한 본질의 은유와 같다. 특히 신체를 표현한 작품에 있어서 작가가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은 마치 철학에서 그토록 탐구하려고 했던 육체·물질과 영혼·정신과 같은 개념 이전에 존재하는 실재(實在)이다. 여기서 개념 ‘이전’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작가가 찾는 그 무엇이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의 테두리를 벗어나 그 본질에 앞서는, 상식 이전의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이라 보기 때문이다.
강덕봉이라는 한 사람이 탐구하며 표현하고 있는 세상의 복잡한 모습은 사람의 신체나 사물의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기에 너무나 익숙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이는 기존에 미래파 작가들이 탐구하려고 했던 속도의 형상적인 접근법이 아닌, 그 형상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힘과 움직임의 다양한 작동 원리와 그에 따른 변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작가가 사물 보다는 인체를 표현할 때 더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작가가 인간의 신체를 통해 속도와 방향을 표현함으로써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신체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물질 에너지라는 측면 외에도 신체를 매개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그 근원의 역동의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특히 물질의 속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실체의 관계에 있어 강덕봉이 추구하는 작업 방식은 실체의 형상을 통해 그것이 품고 있는 속성을 반추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결국 형상과 대상이 같아지는 그 순간의 지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강덕봉의 이러한 시도는 철학사에서 여러 관점으로 제시되어 왔던 정신과 신체의 관계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던 반면 스피노자는 심신(心身) 평행론을 통해 정신과 신체 사이의 관계 뿐 만 아니라 각 대상들의 관계에까지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생각은 『윤리학』에서 잘 드러난다.
스피노자의 개념어인 코나투스(Conatus)는 어떤 대상의 본질과 성질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의 개체 성질을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개체들 간 혹은 개체와 그 개체를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강덕봉의 작품인 두 개의 <00ː00ː00ː01>(2013)부터(2018)에서 까지 두루 실험되고 있다. 다른 작품에 비해 이 세 작품이 가지는 특이성은 PVC 파이프로 구성된 속도감을 드러낸 두 명의 신체 형상에서 하체만 표현이 되어 있고 이는 얼굴 없는 무명의 존재가 하나의 투명 관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이한 사항은 <00ː00ː00ː01>의 두 개의 작품이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 하나는 각자 왼쪽과 오른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투명한 관이 서로의 힘 때문에 중간이 늘어지고 있으며, 또 다른 작품의 경우 서로 마주보고 달려오는 사람 두 명은 그 투명 관을 쪼그라트리고 있다. 이렇듯 신체는 혼자의 힘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힘은 사람이나 사물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작동의 에너지이자 권력의 형태로 작용하는데 <00ː00ː00ː01>에서의 두 사람은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인 구별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권력에의 의지와 그에 따른 힘겨루기를 보여준다.
이렇듯 신체의 형상은 하나의 사유하는 공간이자 힘들의 작용 방식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용들(affections)이라 볼 수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코나투스를 이러한 맥락에서 적용해 보았을 때 이는 힘들을 지탱하려는 개체의 노력과 다름 아니다. 여기서 ‘변용’이란 한국어로 해석에 대한 논란이 다분한 ‘affection’의 단어를 일컫는데, 스피노자의 이러한 사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들뢰즈의 경우에는 이 단어의 근원이 되는 라틴어 ‘affectio’라는 단어를 어떤 개체의 상태에 영향을 받은 물체 또는 육체의 변상(變相)으로서의 변화하는 형상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을 바탕으로 신체와 감정을 힘의 본성과 그 작용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했다. 이는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단지 절대적으로 순수하게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작용 받고 있는 그 상태 자체이고 그것은 곧 마음이자 신체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그 무언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본질은 무수히 변화되고 있는 작용이자 영향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작용’의 관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부유하는 공간 1>(2018), <부유하는 공간 2>(2018) 그리고 <부유하는 공간 3>(2015)이다. 이 작품 시리즈는 PVC 파이프로 신체를 구성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신체와 그 환경적 배경을 전환시키며 본질의 변용(affection)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신체의 변용(transfiguration)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앞에서 육체의 변상(變相)으로서의 ‘affectio’라는 단어가 어떠한 힘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그에 따른 형상이라고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존재들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본질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면 신체가 놓인 환경 자체가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자, 그 신체는 그 환경을 구성한다는 맥락에서 작가가 사용한 PVC 파이프는 하나하나의 분자(molecule)와 같다. 이는 마치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e)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무엇으로도 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본질이자 힘의 속성을 가진 실체라고 볼 수 있다. 강덕봉의 작업은 이렇듯 외부적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법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자론적 법칙에 따라 본질을 파헤치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개체의 힘과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움직이고 있는 신체이다. 이 부분이 작가의 과거 2010년 이전 작업 방식과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전 작업에서 작가가 단면의 구멍을 통해 사물 또는 인체를 바라보며 하나의 부분으로서의 전체를 면밀히 탐구하고자 했다면, 최근의 ‘속도’ 개념을 부여한 작품에서는 신체의 바깥에서 신체가 매개가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운동’과 ‘힘’을 표현한다. 속도 에너지를 통해 신체가 매개되는 모습은 신체의 변용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신체를 재탐구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탐구는 <인식하는 신체>(2018)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쉬폰 천에 PVC 파이프를 사용한 인체 형상을 디지털 프린팅 한 후 세 겹의 다른 이미지를 겹쳐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을 표현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빠른 속도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잔상의 다발(cluster)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인식하는 신체>에서는 새로운 매체의 시도를 통해 그 잔상을 착시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특히 이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속도의 사이”를 생성하며 순간순간 놓인 영원의 공백을 표현한다. 이 순간의 공백은 작가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작품의 개체들과 환경의 테두리를 다시 한 번 재설정하는데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의 심상이 그 시간적 공간에 유입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러한 설정은 작품을 통해 관람자를 쉬폰 천 사이의 뿌연 공간 속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작가의 최근 작품에서 살펴본 신체는 단발적으로 생겨나고 변하는 속도 뿐 만이 아니라 그 속도의 중간 중간 힘이 개입하고 환경적 요소에 의해 영향 받는 상호작용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개체적 요소들이 군더더기 없이 차가운 PVC 파이프의 조합으로 연결된다. 다양한 길이의 무수한 PVC 파이프의 조합을 통해 관람객에게 시각적, 공간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가는 마치 빠른 속도 안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어떤 것들의 사이를 파헤치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시시때때로 무언가와 힘겨루기 하는 우리 모두의 자아와도 같다. 그 이유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속도 속의 잠깐의 공백을 파헤쳐 나가기를 희망하는 작가의 제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았을 때에는 작품에 등장하는 자동차, 오토바이, 사람 등은 주로 속도감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표피적 측면이 아닌 내용적 측면에서 작품을 해석해보자면 대상의 형상은 작가가 찾고자 하는 어떠한 본질의 은유와 같다. 특히 신체를 표현한 작품에 있어서 작가가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은 마치 철학에서 그토록 탐구하려고 했던 육체·물질과 영혼·정신과 같은 개념 이전에 존재하는 실재(實在)이다. 여기서 개념 ‘이전’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작가가 찾는 그 무엇이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의 테두리를 벗어나 그 본질에 앞서는, 상식 이전의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이라 보기 때문이다.
강덕봉이라는 한 사람이 탐구하며 표현하고 있는 세상의 복잡한 모습은 사람의 신체나 사물의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기에 너무나 익숙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이는 기존에 미래파 작가들이 탐구하려고 했던 속도의 형상적인 접근법이 아닌, 그 형상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힘과 움직임의 다양한 작동 원리와 그에 따른 변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작가가 사물 보다는 인체를 표현할 때 더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작가가 인간의 신체를 통해 속도와 방향을 표현함으로써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신체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물질 에너지라는 측면 외에도 신체를 매개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그 근원의 역동의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특히 물질의 속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실체의 관계에 있어 강덕봉이 추구하는 작업 방식은 실체의 형상을 통해 그것이 품고 있는 속성을 반추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결국 형상과 대상이 같아지는 그 순간의 지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강덕봉의 이러한 시도는 철학사에서 여러 관점으로 제시되어 왔던 정신과 신체의 관계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던 반면 스피노자는 심신(心身) 평행론을 통해 정신과 신체 사이의 관계 뿐 만 아니라 각 대상들의 관계에까지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생각은 『윤리학』에서 잘 드러난다.
스피노자의 개념어인 코나투스(Conatus)는 어떤 대상의 본질과 성질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의 개체 성질을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개체들 간 혹은 개체와 그 개체를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강덕봉의 작품인 두 개의 <00ː00ː00ː01>(2013)부터
이렇듯 신체의 형상은 하나의 사유하는 공간이자 힘들의 작용 방식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용들(affections)이라 볼 수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코나투스를 이러한 맥락에서 적용해 보았을 때 이는 힘들을 지탱하려는 개체의 노력과 다름 아니다. 여기서 ‘변용’이란 한국어로 해석에 대한 논란이 다분한 ‘affection’의 단어를 일컫는데, 스피노자의 이러한 사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들뢰즈의 경우에는 이 단어의 근원이 되는 라틴어 ‘affectio’라는 단어를 어떤 개체의 상태에 영향을 받은 물체 또는 육체의 변상(變相)으로서의 변화하는 형상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을 바탕으로 신체와 감정을 힘의 본성과 그 작용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했다. 이는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단지 절대적으로 순수하게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작용 받고 있는 그 상태 자체이고 그것은 곧 마음이자 신체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그 무언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본질은 무수히 변화되고 있는 작용이자 영향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작용’의 관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부유하는 공간 1>(2018), <부유하는 공간 2>(2018) 그리고 <부유하는 공간 3>(2015)이다. 이 작품 시리즈는 PVC 파이프로 신체를 구성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신체와 그 환경적 배경을 전환시키며 본질의 변용(affection)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신체의 변용(transfiguration)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앞에서 육체의 변상(變相)으로서의 ‘affectio’라는 단어가 어떠한 힘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그에 따른 형상이라고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존재들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본질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면 신체가 놓인 환경 자체가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자, 그 신체는 그 환경을 구성한다는 맥락에서 작가가 사용한 PVC 파이프는 하나하나의 분자(molecule)와 같다. 이는 마치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e)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무엇으로도 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본질이자 힘의 속성을 가진 실체라고 볼 수 있다. 강덕봉의 작업은 이렇듯 외부적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법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자론적 법칙에 따라 본질을 파헤치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개체의 힘과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움직이고 있는 신체이다. 이 부분이 작가의 과거 2010년 이전 작업 방식과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전 작업에서 작가가 단면의 구멍을 통해 사물 또는 인체를 바라보며 하나의 부분으로서의 전체를 면밀히 탐구하고자 했다면, 최근의 ‘속도’ 개념을 부여한 작품에서는 신체의 바깥에서 신체가 매개가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운동’과 ‘힘’을 표현한다. 속도 에너지를 통해 신체가 매개되는 모습은 신체의 변용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신체를 재탐구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탐구는 <인식하는 신체>(2018)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쉬폰 천에 PVC 파이프를 사용한 인체 형상을 디지털 프린팅 한 후 세 겹의 다른 이미지를 겹쳐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을 표현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빠른 속도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잔상의 다발(cluster)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인식하는 신체>에서는 새로운 매체의 시도를 통해 그 잔상을 착시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특히 이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속도의 사이”를 생성하며 순간순간 놓인 영원의 공백을 표현한다. 이 순간의 공백은 작가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작품의 개체들과 환경의 테두리를 다시 한 번 재설정하는데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의 심상이 그 시간적 공간에 유입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러한 설정은 작품을 통해 관람자를 쉬폰 천 사이의 뿌연 공간 속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작가의 최근 작품에서 살펴본 신체는 단발적으로 생겨나고 변하는 속도 뿐 만이 아니라 그 속도의 중간 중간 힘이 개입하고 환경적 요소에 의해 영향 받는 상호작용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개체적 요소들이 군더더기 없이 차가운 PVC 파이프의 조합으로 연결된다. 다양한 길이의 무수한 PVC 파이프의 조합을 통해 관람객에게 시각적, 공간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가는 마치 빠른 속도 안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어떤 것들의 사이를 파헤치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시시때때로 무언가와 힘겨루기 하는 우리 모두의 자아와도 같다. 그 이유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속도 속의 잠깐의 공백을 파헤쳐 나가기를 희망하는 작가의 제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